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른 목소리로 (문단 편집) === 보편윤리로서의 돌봄? === [[1993년]], 《돌봄 민주주의》 라는 저서로도 국내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린 바 있는 조운 트론토(J.Tronto)라는 정치학자는 《Moral Boundaries》 라는 책에서[* Tronto, J. C. (1993).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Psychology Press.] '''보편적 윤리로서의 돌봄의 윤리'''를 강조했다. 트론토는 돌봄의 4가지 윤리적 요소, 즉 '''주의깊음'''(attentiveness), '''책임감'''(responsibility), '''유능성'''(competence), '''반응성'''(responsiveness)을 설정하고, 이들 요소들은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수많은 영역들과 도처의 분야들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남성들의 정의의 윤리는 '도덕적 최소한의 의무' 인 반면, 여성들의 돌봄의 윤리는 그보다 상위적인 의무이기에, '''정의가 돌봄의 특수한 종류로서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돌봄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매 순간 돌봄의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뭇 사람들이 제 자신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고 '착각'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수많은 분야들의 연구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맥락에서 연구자들은 '''돌봄의 사회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허라금(2006)은 자신의 논문에서[* 허라금 (2006). 보살핌의 사회화를 위한 여성주의의 사유. 한국여성학, 22(1), 115-145.] 길리건의 돌봄의 윤리가 가구 내에서의 여성의 노동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도용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안전망의 한 종류'''로 인식되어야 하며, 우리 사회 전체가 제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할 당위를 제시한다고 하였다.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서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인식하고 돕는 것처럼, 공적 영역에서도 우리 사회가 각 구성원들의 필요를 인식하고 돕자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나 [[공동체주의]], [[복지]] 제도에 대한 정치철학적 관점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어서, 많은 관련 연구자들이 손을 대기도 했다. 예컨대 수전 오킨(S.M.Okin)은 [[존 롤즈]]가 가정한, 보편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쓴 합리적 존재조차도, 그가 가진 정의감은 결국 '''아동기 가정에서의 돌봄이 없었더라면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내 연구자들은 상당히 큰 난관에 봉착해야 했다. 타 분야의 연구자들이 본서의 통찰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돌봄의 윤리가 남성의 그것만큼 "보편적" 이라는 것이 본서에서 따로 확실히 논증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초 길리건은 남성의 정의의 윤리에 대등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윤리로서 여성의 돌봄의 윤리를 제안했다는 전후맥락을 갖고 본서를 썼었다. 이 때문에, 길리건의 작업만으로는 '''돌봄의 윤리를 여성들만의 특수윤리 이상으로는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 즉, 돌봄의 윤리가 보편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길리건처럼 "서로 대등하다" 고 말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정의의 윤리도 결국에는 돌봄의 윤리의 한 종류라고 해석될 수 있다" 고까지 말해야 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상단에서 소개한 조주영(2009) 역시 정의의 윤리와 돌봄의 윤리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불명확하다고 비판했다.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으로서, 상단에서 소개한 이정은(2009)은 길리건이 지향했던 돌봄의 윤리의 보편윤리화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를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 돌봄의 경험을 소개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고 있다. 실제로 본서에서 남성들에 관련된 면접 기록이 일부 소개되기는 하지만, 길리건은 남성들이 '얼마나 돌봄에 관심이 없는지' 내지는 '얼마나 돌봄의 윤리와는 차이가 나는지' 에 초점을 맞추어서 소개한 바 있다. 설령 남성들에게 "귀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고 계십니까?" 라고 질문하더라도, 이들은 대체로 "글쎄요, 저는 [[의사]]니까 늘 환자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지요" 라고 하거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들 먹여살리는 게 돌보는 거지요" 라는 식으로 '''직업활동에 입각해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해석한다면, 남성들은 예컨대 "제 친한 친구가 최근에 [[실연]]을 겪어서 새벽에 전화를 걸었길래, 둘이 같이 울면서 몇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위로해 줬습니다" 같은 식의 대답은 잘 안 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이런 측면들을 부각한다면, 돌봄의 윤리는 결국 '그들의 일부 특수한 윤리' 로만 남게 되고, 남성들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길리건이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런저런 철학적 논변들을 덧붙이고 보강하면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정은(2009)의 지적이다. 길리건의 본서는 일차적으로 ([[발달심리학|발달]])[[심리학]]계와 [[철학]], [[윤리학]] 정도를 상정하고 작성되긴 했지만, 오늘날 많은 분야의 학자들은 본서를 읽으면서 그것이 자신들의 분야에도 그럴듯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사회복지학]]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는, 돌봄의 윤리를 여성들 간의 사적 네트워크가 아니라 아예 제도화하고 정책화된 형태로 이해함으로써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 복지정책의 정당화,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복지국가]]의 기본철학 및 운영원리로 삼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간호학]] 분야에서도, [[간호사]]들의 직업윤리가 환자들을 돌보며 소모적으로 일하다 [[과로]]로 쓰러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과 환자들의 건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논증이 가능한 데에는 돌봄이 단순히 "여성들에게 한정된" 윤리가 아니라 '''"남녀 모두의" 보편윤리'''라는 트론토의 주장이 별도로 뒷받침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